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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전시예쁜 쓰레기 : The Beautiful Trash

  • 전시일정 2024. 10. 08(화) ~ 2024. 11. 16(토)
  • 전시시간 화-토, 10:00~19:00
  • 전시장소 청문당 2,3층
  • 참여작가 최지이, 엄아롱, 정윤선, 정혜정, 최성임
  • 주최 (재)행복북구문화재단
  • 주관 (재)행복북구문화재단
  • 문의 053)320-5123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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믹스 앤 매치 청문당 프로젝트 전시 <예쁜 쓰레기>는 제목부터 역설의 논리를 가리킵니다. 제가 작가라면, 쓰레기가 작품을 비유하는 건데 자신이 애써 만든 예술품을 그렇게  부르는 게 못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논리의 한 가닥을 따르면, 예술은 본질적으로 잉여의 코드를 따르는 제도입니다. 게다가 이들 작품이 폐기된 걸 재활용되거나 사용가치가 바뀐 물건을 곧잘 다룬다는 점에서, 저는 전시 제목이 그렇게 매몰차다고 보진 않는 쪽입니다. 정작 저의 걱정은 약간 비켜난 몇 군데에 가 있습니다. 


  저는 예쁜 쓰레기라는 표현으로부터 스위스 브랜드 프라이탁(Fretag)의 연상을 끊기 힘들군요. 이 가방이 한국에 들어오기 전부터 현지 소비자들이 비슷한 말을 썼고, 우리나라에서도 이들 제품을 두고 예쁜 쓰레기라 불렀습니다. 그 가방이 기성품이지만 유일무이한 개체성을 가진다는 점은 공예품과 비슷한 구석도 있습니다. 프라이탁은 자신들 기업 가치를 업사이클링에 의한 사회공헌에 둔다 합니다.


  <예쁜 쓰레기>는 어떤 면에서는 거친 지칭의 표현이 우려되고, 한 편으로는 기업 제품이 퍼트린 담화에 종속된 어감 탓에 오해의 여지가 있는 타이틀입니다. 그래서 저는 주 제목의 부제로 ‘Where do they come from and where do they go?’를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말로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생각했던 건 환경미술의 시각을 넌지시 드러낼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었습니다. 


 아무튼 설명조로 딸린 부제목이 있거나 없거나 상관없이, 이 전시가 기후변화와 같은 환경위기를 다룬다는 사실도 미리 짐작한 관람객은 많습니다. 기후위기에 관한 예술계의 반응은 줄리의 자건거(Julie’s Bicycle)가 상징하는 자생적인 운동이 출발점이었습니다. 그곳은 2006년의 영국이었고, 음악계가 움직임을 이끌었습니다. 운동은 유럽대륙을 거쳐 세계로 퍼졌고, 예술인들이 주도하던 이벤트가 작동원리가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 행정과 경제 체계를 가격하며 거버넌스를 형성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저는 비교적 일찍부터 이 과정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한국 예술계는 이천십년대부터 안테나가 서양쪽으로 뻗은 소수의 작가가 담론을 수용했고, 예술기관은 예술가들이 아닌 행정지침에 의한 수동적 각성으로 ESG를 실천하고 있습니다. 기획전 식으로 형성한 미술의 움직임도 서울이 빨랐고, 바다를 낀 부산과 제주도가 뒤를 이었습니다. 한국 동시대미술의 한 축인 대구 미술에서 2024년은 ESG의 원년으로 기록될 겁니다. 뭔가 하니까, 기후위기를 주제로 삼은 전시가 올 여름을 정점으로 여러 곳에서 벌어졌습니다.


 그들 전시에 비하면 청문당의 프로젝트는 후발주자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허나 뒷북이라고 칭할 수 없는 사실이 있습니다. <예쁜 쓰레기>는 일련의 프로그램의 연속선 상에서 기획된 전시입니다. 지난 6월에 행복북구문화재단이 주최한 포럼 <기후위기와 문화예술>은 기후학자 김해동, 업싸이클 아티스트 훌라 그리고 이번 전시에 참여한 정윤선 작가가 주제 발표한 토론장이었습니다. 또한 어울아트센터 내 갤러리 금호에서 청년작가를 중심으로 전시가 있었습니다. 세 번째 순서에 해당하는 <예쁜 쓰레기>는 한 기관이 기후위기 문제에 접근하기로 한 선언 삼부작의 결산편입니다.


 전시는 어울아트선터를 벗어나 젊은 유동인구가 많은 청문당에서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갤러리 금호의 큰 전시 공간과 편의시설을 감안할 때 본 프로젝트가 청문당에서 이뤄지는 이유가 있을 겁니다. 저는 이 전시가 유아 및 초중고등학생 단체관람의 견학 용도가 아니라고 봅니다. 공간 수용 규모나 동선 때문에 그렇기도 하지만, 전시 작품의 구현이 동시대 시각예술의 원리를 훈련받은 관객에게 맞춰진 사실로써 내린 판단입니다. 특히 지역 미술대학 전공자들과 청년미술가들과와 젊은 기획자들이라면 필견의 가치가 있습니다. 왜냐면 선별된 기성 작가군이 다루는 이 주제는 앞으로도 당분간 시각예술계에서 뜨거운 이슈로 환영받을 게 분명하니까요.    


 전시공간 구성은 참여작가와 세 개의 건물 층간으로 나뉘어 여섯 부분입니다. 건물 외부로 노출된 곳에 최성임 작가가 플라스틱 오브제를 사용해 환영을 연출했습니다.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통로에 정혜정 작가가 파사드로 보여주는 바다 풍경의 미디어아트가 있습니다. 2층에는 폐자원 재활용으로 제품을 만든 팝업 쇼룸이 입주했습니다. 이 방은 전시장 내부에는 엄아롱 작가가 업싸이클링 인스톨레이션으로 완성한 파인아트의 장과 교차 감상하는 효과를 보여줍니다. 가장 윗층에는 최지이 작가와 정윤선 작가가 미술이 허락하는 여러 매체의 포괄적 작품이 배치되었습니다. 


 작가 상당수의 작업 특성상 그들의 작품은 전시장 안에 디스플레이해 공개하는 포스트 프로덕션 말고도 그 전후 과정도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이를테면 리서치와 수집, 교육 프로그램 같은 이벤트가 해당합니다. 정윤선 작가와 엄아롱 작가가 그곳에 나설 예정인데, 왜 그래야만 하는지에 관해서는 작가들과 그들 작품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다섯 작가의 작업을 이번 공개작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윤규홍/예술사회학자)

 

 

엄아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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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아롱 작가입니다. 누가 버린 물건을 모아서 새 맥락을 창출하는 설치작가입니다. 2024년 올 한해만 하더라도 여러 활동을 했다고 들었는데, 우선 사회적 예술의 전형처럼 보이는 협업 활동이 있었습니다. 상반기에는 월요살롱과 만아츠 만액츠와의 프로젝트가 있었습니다. 


작가가 최근에는 남아프리카공화국 한국문화원이 ACC와 그 나라에서 벌인 <반디 산책 Bandi Walk: 지구와 화해하는 발걸음>을 다녀왔다고 합니다. 저는 믹스 앤 매치 프로젝트로 청문당에서 작업을 대합니다.


이번에 공개하는 작품은 <히말라야>입니다. 추가설명 없이 제목만 알고 나면 더 아리쏭해지는 작품입니다. 작품은 히말라야를 표상하거나 현지 조달한 오브제가 안보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현지에서 찍은 영상이 있지만요. 


작업의 구성물은 서울이 뱉어놓은 폐품입니다. 작가는 본인의 대도시의 공간 경험을 연거푸 이어진 비자발적 이주에 포갭니다. 저는 그가 살아온 배경을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만, 거기서 비롯한 정서가 작품에 반영되었다는 진술을 믿어봅니다. 도시사회학은 한국 산업화 기간에 지방에서 상경한 인구가 한 주거지에 정착 못하는 사례가 많다고 관찰했습니다.  특히 기층 계급은 작가의 표현인 뿌리없는 식물 같은 생활 공간 패턴을 그립니다.       


그래서인지 엄아롱 작가의 갈망은 장소 확보에 맞춰졌습니다. 일차적으로 주거지에 관한 바람이 있었을테며, 작업실 욕심이 그 다음이었을 겁니다. 미술가들이라면 누구나 갖는 이 현실적 고민 가운데, 작가가 간 곳이 히말라야였다고 합니다.


거기서 작가가 깨달은 게 있다고 합니다. 그곳 공기는 산악부 밥을 먹은 저도 좀 압니다. 엄아롱 작가가 갔던 산이 트래킹 체험 코스인지, 6000m좌 이상의 등정인지 저는 모릅니다. 이렇든 저렇든 원칙은 같습니다. 짐의 최소화입니다. 


현실 속에서 잦은 이사를 해본 사람들은 다들 그 원칙을 알 겁니다. 이렇게 해서 세운 관점에서 보면 지금 우리들의 도시는 너무나 많은 물건을 쉽게 구하고 버립니다. 유물과 폐기물, 유적과 폐허는 차이가 없습니다. 있다면 소유한 사람들이 가치를 정한 기준일 겁니다. 


이탈로 칼비노는 집안 물건을 수거함이든 쓰레기차든 밖으로 내 보낼 때가 쓰레기는 사적 영역에서 공적 영역으로 진입하는 순간이라고 했습니다. 엄아롱 작가는 질서의 재배열이란 유사 창조행위를 통해, 공적 영역의 잔해를 공공 미술로 지속성을 살렸습니다.    


환경 미술의 테두리 안에 있는 많은 작가가 바다쓰레기를 모아서 작품화하는 방법을 취합니다. 그런 추세에 익숙한 관람자들은 엄아롱의 <히말라야>를 현지수집물의 환경보고서라고 어림짐작하고 전시장에 들어갔을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에베레스트 카라코롬 낭카파르바트 루트가 쓰레기길이 된 건 오래 전 일입니다.

 

 

정윤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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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선 작가입니다. 이번에 작가는 전시장 안에 목재를 써서 구조물을 세웠습니다. 나무 기둥 곳곳에는 형광등을 끼웠고, 머플러와 옷가지류가 걸렸습니다. 모니터 화면과 캔버스 사진은 어떤 도시 풍경과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여줍니다. 이런저런 날짐승과 개 고양이 이미지가 눈에 띕니다.

 

가장 눈길이 가는 건 나무 틀 위에 자리잡은 입체물입니다. 이게 골판지 포장박스 같은 종이를 자르고 붙인 거란 건 금방 알 수 있지만, 어떤 쓰임새나 뜻을 담은지는 알기 어렵습니다. 정체에 관한 해답은 사진 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덮어쓸 수 있는 물체입니다.

 

정윤선 작가가 이 사물의 명칭을 마스크라고 못 박았으니 가면은 맞는데, 어떤 건 헬멧 크기이고 어떤 건 상체가 전부 들어갈 것처럼 큰 것도 있습니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데, 마스크는 정윤선 작업에 좀처럼 빠지지 않는 예술 표식입니다.

 

작가는 우리나라 전국 그리고 세계를 돌아다니며, 머무는 장소를 살핍니다. 현지에서 거둬들인 포장 상자를 갖고 문제의 마스크를 완성합니다. 작가가 제작한 마스크는 미술관이나 갤러리로 곧장 향하지 않습니다. 그것들을 수소문해서 만난 그곳 사람들이 쓴다고 합니다. 개인 인증샷부터 예술 퍼포먼스, 지역 축제까지 이벤트 폭이 넓습니다. 그 현장은 기록으로 남은 이미지가 되어 이번 전시처럼 현물과 함께 공개되기도 합니다.

 

아무리 봐도 소개를 열거한 것들의 조합은 좀 엉성한 면모가 있습니다. 이런 결과는 작가의 조형 솜씨가 엉터리라서 그런 게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정윤선 작가의 인스톨레이션은 그게 다 임시로 연출된 방편이며, 이내 흔적을 지울 거라는 메시지를 포함합니다.

 

정윤선 작가의 미술을 이를테면 설치, 회화, 조각, 사진, 영화, 아카이브, 퍼포먼스 등 장르를 가리지 않는 작업이라고 부르는 건 틀린 말은 아닌데, 좀 뻔합니다. 세상에 그런 작가가 한둘도 아닐텐데요. 한 마디로 규정할 수 없지만, 작가가 다른 미술가들과 차별화를 이루는 점은 있습니다. 예술을 보여주는 채널의 혁신입니다.

 

미술 창작자의 작품은 세상을 관찰하고, 표현 방법을 실험한 후 얻은 계획을 바탕으로 작업실에서 완성됩니다. 그건 화이트큐브건 팝업 로케이션이건 전시회 형식으로 관람객을 불러 모읍니다. 이 원래 방식이 잘못된 건 아닌데, 정윤선 작가는 사회참여 미술이라는 목적을 두고 현장으로 더 깊히 들어갑니다. 말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창작과 전시 형태는 미술 배달, 도시락 미술, 작품 왕진 서비스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이번 기획 전시 출품작의 레퍼런스는 영국과 스페인에서 포착하고 수집한 활동의 물증입니다. 그곳들은 작가가 유학과 레지던시 체류 같은 생활 터전이고, 따라서 단순한 방문지가 아니었습니다. 또한 작가의 작업 방향은 환경문제의 고발에 닿지만, 예컨대 인권향상, 빈부평등, 반전반핵 같은 주제와 얽혀있습니다.

 

 

 

모든 사회문제는 연동되어 있으며, 한 가지 실천이 또다른 문제 관찰의 단초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이 그의 작업에 서려 있습니다. 마스크는 독립된 작품보다 구성의 일부로서 성격이 짙습니다. 그것들은 이 예술가가 조망하는 다사다난을 단 하나로 상징하고자 하는 중층결정의 산출물인 셈입니다.

 

 

 

 

정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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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정 작가입니다. 작가가 보여주는 작업 가운데 우선하는 건 영상이고, 가장 빈번히 다루는 소재는 해양생태 속 몇몇 생명체들입니다. 저는 작가가 굵직한 레지던시를 훓고 다니던 초기시절부터 드문드문 봐 왔습니다. 기억에 남은 쇼는 탈영역우정국에서 벌였던 개인전과 광주 지맵의 단체전입니다. 최근에 대안공간 루프에서 한 개인전 <멍게와 나>는 놓쳤습니다.

 

방금 말을 꺼낸 멍게를 비롯해 산호, 그리고 우리가 따개비라고 부르는 생태종이 여러 작품에 등장합니다. 당연히 펼친 세계는 바다의 수면과 물속입니다. 관점과 배율이 다른 몇 가지 씬이 모여 한 작품을 이룹니다. 영상은 감상의 영역이자 학습의 의사소통 구실을 합니다.

 

내용을 짧게 간추리면 이렇습니다. 따개비는 멍게와 산호도 그렇지만, 유생체 단계에선 바닷속을 떠다닙니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에 이르러 이들 종은 한 곳에 식물처럼 달라 붙어 남은 생을 보냅니다. 핵심은 이 유기체가 어디에 고착하느냐입니다.

 

이건 우리가 아는 그대로입니다. 만약 따개비가 고래나 거북의 등, 선박 또는 크고 작은 해양쓰레기를 터전으로 삼으면, 개체 의지와 상관없이 또 다른 이동 생활을 하는 셈입니다. 바로 비유적인 타이틀 <히치하이커>는 이 딴 존재에 얻어 탄 생물들의 이동경로를 중심으로, 먹이사슬, 해류와 환경 변화 같은 외생변수의 작용을 시각화합니다.

 

<히치하이커>는 우선 기술이 선취되어 발상을 받혀주어야 존재가능한 미디어아트입니다. 그 기술은 시각효과를 나타내는 도구도 있지만, 작가와 같은 부분을 파고드는 과학의 절차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과학이나 기술이나 그게 그거 아닌가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둘은 제도의 기능이 전혀 다른 사회 체계입니다. 과학자가 아닌 작가는 학교에서 제반 기술은 습득했지만 여전히 예술의 영역에 묶이는 사람입니다. 그 어떤 이유보다 작가는 여전히 연필로 그리기를 하는 미술가입니다.

 

또 한편으로 환경문제에 준거해 볼 때, 정혜정 작가는 사회적 역할의 유사 수행자로서 면모 또한 환경운동가와 환경과학자라는 이중의 코드를 가집니다. 허나 작가는 둘 중에 과학자에 더 가깝습니다. 왜냐면 이 작업은 대상을 관찰하고 이해하고 나타내는 탐색 단계에 무게가 실렸기 때문입니다. 실천은 또 다른 다수의 몫입니다.

 

제가 정보를 미처 얻지 못한 부분이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불거지는 부분은 작업 동기입니다. 바다생태를 다루게 된 까닭이 이를테면 지난 과거에 목격했던 이미지 잔상 때문인지, 과학 다큐멘터리가 촉발한 호기심인지, 아니면 또 다른 무엇 때문일까요. 환경과 생태를 업으로 삼은 미술가들이 바다를 다루는 건 이제 너무 흔한 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정혜정 작가의 예술형식은 좀 더 특별한 구석이 많습니다. 여러 구석에서 작가는 특정 생물 군집의 서식이라는 한 주제에 관하여 각각 다르게 확보한 시점으로 연거푸 질문합니다. 한 가지 연작 안에서 각 작품은 보여주기 방식이 서로 다릅니다. 하나의 본편이 있다면, 다른 작품은 그 작품의 스핀오프 격에 놓입니다. 청문당에 공개된 이번 영상작업도 그렇습니다.

 

예술 작품은 과학이 매달리는 논리의 단순화 대신 훨씬 풍부한 비유와 상상력을 제시합니다. 작가는 유기물과 무기물, 인간과 비인간, 동물과 식물, 주체와 객체 간의 경계 교란을 보여주기를 즐기는 것 같습니다. 바닷물은 그 자체가 무기체지만 그 안에 숱한 플랑크톤이 사는 공동체이기도 합니다.

 

한 생명이 다른 생명에 얹혀 사는 걸 기생이라고 부르지요. 허나 따지면 그건 큰 덩치에 작은 개체가 붙은 고착 상태가 아니라, 기생체가 숙주의 에너지를 빼앗는 흡착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보는 혐오스러운 거북의 등딱지가 실은 기생도 공생도 아니라는 시각은 이 때문입니다.

 

 

 

냉랭한 관찰을 원칙으로 삼은 사회과학에서 기생은 숱한 사례가 있습니다. 우선 생각나는 건, 예술계에서 작가에 기생하며 뒤를 쫓아 돈과 명성과 저작물을 챙기는 비평가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최성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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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임 작가입니다. 누구나 마음만 먹는다면 어렵잖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갖고 딴판을 펼쳐보이는 미술가입니다. 저는 아쉽게도 초기 작품을 직접 보지 못했어요. 그때와 지금은 겉모습에서 달라진 점이 제법 있습니다. 코로나 시대로 빠져들던 그해 봄이라 제한적인 감상 환경이었으나, 전시 두 건을 접한 기억이 있습니다. 용산 디스위캔드룸과 대구 중구 봉산문화회관 유리상자에서 각각 벌였던 개인전입니다.

 

그 이후 지금껏 제가 물리적으로 최성임 유니버스에 가장 근접할 수 있었던 기회는 올 상반기 봉산 유리상자의 특선집 형식인 <> 전시였습니다. 안된다는 걸 저도 알지만, 슬쩍 만지기까지 했습니다. 그때 보고 만졌던 설치가 지금 제가 다시 주목하는 <끝없는 나무>입니다. 합성수지 재질의 공을 귤이나 양파를 넣어도 될 것 같은 긴 망에 채우면 막대기 형태가 됩니다. 마치 RNA구조처럼 길다랗고 울룩불룩하게 이어진 봉이 천장 철망에 엮여 무수히 매달립니다. 작가가 미리 생각해 둔 길이와 색상과 간격은 그 덩어리가 보여주는 아름다움의 장치입니다.

 

이렇게 연출한 작품이 거느린 주제는 여러가지입니다. 저는 커뮤니케이션의 이중 부호화, 존 듀이 식의 유용/무용성, 제도론적 시각으로 분류하는 예술과 비예술의 구분, 여성 작가가 처한 이중 억압, 자연주의 미술의 환영성, 모양 흐름 군집의 형태학 같은 게 퍼뜩 떠오릅니다. 이 주제들은 만약 제가 본격적인 비평을 한다해도 모두 다루기엔 씨알이 굵은 단위입니다.

 

어디에 촛점을 둬도 좋지만, 대신 저는 노동’, ‘일상’, ‘오브제같은 키워드 만큼은 금지어로 묶고 싶습니다. 이들 낱말이 들어가야 최성임 작가에 대한 무난한 설명투가 완성되는 건 맞습니다. 허나 이 단어를 다른 사람들 작품 해석에 쓰더라도 말이 통할 겁니다. 단수 높은 관람자는 그 이상의 해석을 원합니다. 일단 논의를 이번 전시에 준거하겠습니다. 다룰 만한 주제가 셋입니다.

 

첫째로 '끝없는 나무'는 길게 뻗은 나뭇가지를 뜻하는 것 같은데, 그래도 식물은 생장 한계가 있지 않나요. 나무가 끝없음은 궁극으론 뭘 이야기하는 걸까요. 선이 늘어나는 것 말고 표면적의 증식도 추측합니다. 적절한 햇빛 양분 물을 빨아들이고, 인근 생태 경쟁종들과의 신경전이 없으면, 나무는 커다랗게 줄기를 뻗습니다. 작품에 대비하면 에너지는 창작에 필요한 자본이고 주변 환경은 도시 건조물들입니다.

 

두번째, 식물 성장의 알레고리는 플라스틱류를 설치하는 작가를 농부 내지 정원사에 비유하게끔 합니다. 이건 환경 친화적이지 않은 재료 선택이 옹호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이 작업이 내포하거나 외연의 확장점에는 대지미술, 러브록의 가이아 가설, 돌봄의 예술이 포진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작업 성격을 명제화하기엔 그것들이 만만한 탓에 너무 많이 소비되었습니다. 무엇보다 농사는 제조업보다 덜 반환경적이라는 게으른 인식도 깨트려지고 있는 지금입니다.

 

세번째, 그래서 결론이 중요합니다. 기후변화 시대의 플라스틱 아트는 그 자체의 모순을 어떤 되먹임으로 처리할 수 있을까라는 해법입니다, 그건 달리 말해 최성임 작업 개념의 방어입니다. 폐자원의 업사이클링이 아닌 이상, 작품에 투하되는 자원은 생짜베기 기성품입니다.

 

 

 

저는 작가가 다음과 같이 밝힌 걸 봤습니다. 그건 죽은 나무 속에서도 또 다른 생명이 자란다는 언급입니다. 커다란 고목이 그럴 테고 바다속 고래 사체가 그렇습니다. 장회익의 온생명 개념도 건드렸으며, 생태학 패러다임이 된 변증법적 원리는 다름아닌 위대한 유산과 같습니다. 한 자리를 점했던 큰 존재의 퇴장은 후세대가 자랄 토양이 됩니다. 제가 몹시 꺼리는 네 글자 말이긴 한데, ‘미술 생태역시 자연의 순리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최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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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이 작가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존재와 원리를 비튼 형태를 공간에 채우는 미술가입니다. 현실과 비현실의 교차는 예술이 누리는 특권이지만, 작가는 권리를 뽐낼 생각이 없는 것 같습니다. 미술작품, 그리고 그 독립체를 받히는 배경이 서로 엉켜 있습니다.

 

주객체의 뒤엉킴이 쉽게 드러나는 단서는 벽화입니다. 벽에 그린 그림 앞에서 관람자가 기승전결의 이야기를 찾으려 한다면 실패할 확률이 큽니다. 알 법한 것들이 낯설게 조합된 그림이 그에게 부여된 일곱 면의 벽에 흩어져 있습니다.

 

벽화 도상의 원전은 <마못의 날: 풍수토니 필의 일주일>입니다. 작가가 컴퓨터 안에서 구현한 궁극의 완성도가 있고, 그때그때 호출된 조각이 실재하는 콜라주로 완성하는 식입니다. 꼭 손으로 벽에 그리기만 고집할 이유는 없고, 애니메이션 형식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작품 시리즈 제목에서 창조의 근원을 눈치챘다면, 저 같은 <사랑의 블랙홀(1993)> 팬일 겁니다. 이 영화는 작은 도시 펑수토니의 시공간에 갇혀 매일을 반복해 살아야 하는 주인공 필 코너스의 이야기입니다. 22일 성촉일에 미국 야생동물 마멋을 데려다가 봄날을 점치는 행사가 그 날의 이벤트고요.

 

저는 예전에 한 영화잡지에 썼던 평론글에서, 이 작품을 일신우일신을 통한 진선미의 완성으로 해석했습니다. 영화에는 주인공 필이 마멋과 자동차 운전대를 잡고 삶의 끝을 향해 질주하는 씬이 있습니다. 사람과 짐승이 일체되는 장면이었고, 최지이 작가도 이 미국산 설치류를 거쳐 빌 머레이가 연기한 필의 처지에 공감했을 겁니다. 벽화 속 상상동물은 마못의 이차적 시뮬라르크인 셈입니다.

 

펑수토니의 필과 미술가로서 자신의 관계는 <오드라덱>에도 비춰집니다. 프란츠 카프카로부터 따 왔을 오드라덱은 지극히 현실적인 액자 안에 환상을 끼웁니다. 이 형식의 이중 구조는 액자가 아니라 창문이나 모니터 액정이라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원뿔 모양이 그 액자 안에 있습니다. 작가가 대학을 갓 졸업했을 때 시작했다는 <패턴 연구>와 연관 있지 않나요? 이들 도상 또한 온전히 제시되기 보다 도형을 맞춰가며 기하 연산을 복잡하게 만드는 패턴을 그립니다. 패턴 연구는 입체와 공간 연구로 들어섭니다.

 

커다란 꽃 모양의 입체가 빛을 발하는 <인간의 순교> 다섯 점이 전시공간 바닥에 놓였습니다. 제목도 가리키지만, 종교적인 색이 꽤 짙은 작업입니다. 이 조각 설치는 작가가 봤던, 길에 떨어진 무궁화 꽃봉우리들의 재현체입니다. 당연히 이 작품도 무턱대고 세상에 나온 법이 없이, 전 단계의 개념과 조형 실험을 거쳤습니다.

 

이렇게나 저렇게나 작품 맥락을 아는 게 어렵고, 관객은 의식의 흐름에 자기를 맡기면 편합니다. 이걸 초현실주의라고 불러도 누가 뭐라 하진 않을 거예요. 허나 역사 속 쉬르레알리즘 진영의 대가들이라도 최지이 작가 만큼 예술적 전망을 가지진 못합니다. 왜냐면 그들은 그 시대 사람들이고, 지금은 많은 게 바뀌었고 개인의 정보 취득량도 비교가 안되니까요.

 

그 사이에 문학과 예술에서 통찰의 관점을 보여준 사람은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최지이 작가는 앞서 말한 카프카 이외에도 헤세, 아도르노, 벤야민, 보르헤스, 아감벤의 영향이 컸던 것 같습니다. 작품에 그들이 보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작가를 근대 초기의 부작용 격 존재로 본다는 것입니다. 최지이 작가는 작품을 통한 발설이 남에게 자칫 해를 입힐까봐 조심하는 듯 합니다. 모음 하나씩만 살짝 다른 마못과 머뭇, 두 음운을 되뇌이다가 내린 결론입니다.